2008년 1월 1일 화요일

[Scrap] 열정은 식고 계산만 남아


엄마와 아이가 지하철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엄마가 묻는다. “과자가 얼마지?” 아이가 대답한다. “칠백원”. 엄마는 다시 묻는다. “네가 얼마를 냈지?” 아이는 말한다. “천원”. 그리고 대화가 이어진다. “그럼 얼마를 돌려받아야 하지?” “삼백원”. 엄마는 박수를 치면서 아이의 명석한 셈을 기특해한다. 신나 하는 엄마의 표정에는 성공적 교육에 대한 자부심과 아이의 희망찬 장밋빛 미래가 엿보인다.

알버트 허쉬만이라는 정치경제학자는 『열정과 이익』이라는 에세이에서 자본주의의 정신을 이익으로 상징되는 계산적 합리성으로 정의했다. 그는 서구에서 명예·질투·사랑·증오·폭력과 같은 인간의 열정이 개인의 이익이라는 개념으로 길들여져 가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을 분석했다.

중세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명예와 사랑, 신앙과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상업 문화가 확산되면서 인간은 경제적인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개개인이 계산의 주체로 등장하면서 열정은 이익 도모에 백해무익한 야만적이고도 무식한 행위로 치부되었다. 그래도 19세기까지 유럽에는 결투라는, 명예를 건 열정적 충돌이 귀족의 유산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물론 이후엔 계산적 합리성이 일반화되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21세기 대한민국 사회는 그야말로 허쉬만이 말했던 계산적 합리성이 만발하는 극단적 사회가 아닌가 싶다. 아이들은 경제적 개념을 주입시키려는 부모에게서 어릴 적부터 계산하는 법을 배운다. ‘높은 성적=행복한 삶’이라는 편향된 등식을 암기하면서 석차와 등급을 올리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다. 아이들은 매사 무엇이 자신에게 득이 되는지 잘 알게끔 훈련받는다. 그 사이 타인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점점 흐려져 간다.

국가대사를 논하는 대선의 정국에서도 경제의 논리는 지배적이다. ‘높은 소득=행복한 나라’라는 등식이 보편화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여야,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모두 우리를 잘살게 해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사람은 무엇의 약자인지도 모르지만 CEO 출신이라면 명철한 리더십의 대명사처럼 통한다. 선관위와 신문·방송은 모두 후보의 장단점을 ‘꼼꼼히 따져보고’ 결정하란다. 무슨 기준으로 따져야 할지는 모르지만 따지다 보면 알게 된다는 투다.

한때 상아탑이라고 불리던 대학도 시대의 전염병은 피할 수 없는 모양이다. ‘생산적 학문=높은 소득’이라는 미끼를 보면 암담한 생각이 든다. 수많은 대학이 등급 높은 학술지에 다량의 논문을 실으면 돈을 많이 준다. 철밥통이라 불리는 공무원과 교수에게도 냉철한 잣대를 적용해 경쟁시키고 뒤처지면 쫓아낸다니 세상이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유는 투철한 직업윤리를 가지고 묵묵히 주는 돈보다 더 많이 일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진실은 매장된다.

사람들은 매우 영특해진 듯 보인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합리성이 꼭 합리적이지만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남들보다 잘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데, 결과는 많은 사람이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느낀다. 계산하다 보면 삶이 피폐해지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개개인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공공의 선(善)이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의 말대로 두고 보니 공공의 지옥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계산기를 열심히 두들기다 보면 사랑과 결혼도, 출산과 양육도 모두 손해다. 따라서 인구는 줄어들고 우리는 모두 천천히 늙어 간다. 대한민국이 늙어 간다. 세계가 죽어 간다. 하지만 우리가 타인과의 교감과 약자에 대한 배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희생과 삶에 대한 원초적 열정이 없다면 과연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결정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가장 열정적으로 사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일지도 모른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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